★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 弗, 火, 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1세기의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에 관해서 중국측 기록인 『논형(論衡)』과 『위략(魏略)』에서는, 시조인 동명(東明)이 북쪽 탁리국(橐離國)에서부터 이주해 왔다고 전한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당시 부여인은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고 했다.
★ 부여국은 서로는 오환(烏桓), 선비(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挹婁)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 지대였다.
cf.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 古記云(고기운) 前漢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전한선제신작삼년임술사월필일) 天帝降于訖升骨城[천제강우흘승골성 (在大遼醫州界(재대료의주계)] 乘五龍車(승오룡거) 立都稱王(입도칭왕) 國號北扶餘(국호북부여) 自稱名解慕漱(자칭명해모수) 生子名扶婁(생자명부루) 以解爲氏焉(이해위씨언) 王後因上帝之命(왕후인상제지명) 移都于東扶餘(이도우동부여) 東明帝繼北扶餘而興(동명제계북부여이) 立都于卒本州(입도우졸본주) 爲卒本扶餘(위졸본부여) 卽高句麗之始祖(즉고구려시조)
★ 고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기원전 5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에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 도읍을 세워 왕이라 칭하고는, 국호를 북부여라 하되 자기 이름은 해모수라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훗날 상제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해 나라를 세우니, 졸본을 도읍으로 삼은 졸본부여가 그것이다. 동명왕이 곧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다.
cf. 삼국유사 '기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