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기설기'에서 '얽다'를 찾을 수 있다면, '알기살기'에서 '앍다'를 찾을 수 없는가? 국어사 어휘 목록에는 이것이 들어 있지 않다. 대신 그리스어에서 이것과 비슷한 형태와 의미를 지닌 어휘를 찾을 수 있다. '아르케archē'가 그것이다. '아르케'는 시작, 근원 또는 원리라는 뜻을 가진다. '앍다'와 '아르케'는 모두 [r]과 [k] 음운을 갖추고 있다.
아르케의 소급형은 드라비다 말라얄람 방언 ari나 타밀 방언 ariči와 연관될 가능성이 있다. ari나 ariči는 모두 '낟알'이란 뜻을 가진다. 여기서 ariči의 '-či'는 파생접사일 것이다. 그리고 이 '-či'가 archē의 '-chē'로 변화했을 것이다. 이 경우 '앍다'와 '아르케' 사이의 연관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우리말 어휘 목록에 존재하지도 않는 '앍다'란 어휘를 설정한 다음, 그것을 그리스어 '아르케'와 비교하는 작업은 한편으로는 무리한 일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얼기설기' 문제를 푸는 일은 모두 막혀버린다. 논의 진행을 위해 약간의 모험을 감수하기로 하자. '알>앍다'의 변화를 인정한다면, '아르케'는 '앍다'의 어근 '앍-'과 일정한 관련을 맺는다. 이 경우 드라비다어 '알'은 그리스어 '아르케'의 어원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어가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한다는 일반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간 당혹스럽다. 왜냐하면 드라비다어는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한 산스크리트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알을 아르케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도 아리아족 문학 작품인 리그베다에도 드라비다어의 흔적이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두 언어 사이의 교섭 양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산스크리트어 adi나 agra는 시작이란 뜻을 갖는데, 이것이 드라비다어 ari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궁금증을 더한다. 또한 영어 접두사 ur은 최초라는 뜻을 갖는데, 이것이 adi와 agra 또는 ari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궁금한 문제다. 만약 이들 어휘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면, 알과 아르케의 연결 또한 가능성이 있다.
아르케는 시초 또는 근원이란 뜻을 가진 헬라어 어휘다. 밀레토스 학파의 한 사람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를 공기로 본다. 이때 공기는 생명을 유지시키는 숨이나 영혼과 같은 신적인 존재로 이해된다. 헬라어로 영혼을 프시케(psychē)로 부르는데, 이 경우 그것이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가 된다. 지금은 관념적인 어휘로 사용되지만, 초기 그리스에서는 물질적인 개념으로 이해된 바 있다.
일리아스에서 전사들이 싸우다가 죽는 장면을 묘사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다"는 표현입니다. 멋진 표현이죠? 그런데 그런 표현들 중 하나가 바로 "사지(四肢)가 풀어졌다"는 표현입니다. 이때 영혼은 바로 사지를 묶어주는 끈 같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팔과 다리가 십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다 할 때, 영혼은 그 중심을 묶어주고 있는 끈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죠.
cf. 이정우, 개념- 뿌리들, 그린비, 2012
이것은 프시케에 대한 이정우의 설명이다. 이때 프시케는 물질적인 속성을 띤다. 여기서 아르케를 물질에서 찾는 서양 철학의 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러 프시케는 물질과 대비되는 영혼이란 개념으로 그 의미가 정착된다. 이 경우 세계는 피지스physis와 노모스nomos로 날카롭게 구분되는데, 프시케는 이제 노모스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피지스가 자연이라면, 노모스는 인위가 된다. 피지스는 영혼이 없으므로, 이제 그것은 기계가 된다. 반면 노모스는 영혼이 작동하여 창조한 것이다. 프시케는 피지스와 노모스 구분 이전에는 피지스와 같은 물질 영역에 속하지만, 구분 이후에는 노모스에 소속된다. 이후 오르페우스교나 피타고라스 학파 또는 그 영향권 아래 놓인 기독교 사상에 이르면, 영혼은 육체와 더욱 날카롭게 구분되는 영역이 된다. 이른바 영육의 이분법이 그 예에 속한다.
헬라어로 육체는 σαρξ = sarx이다. Glosbe 다국어 온라인 사전에는 σάρκα =sarka로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 프시케는 사르크스의 상대어가 된다. 그런데 프시케를 아르케로 치환할 경우, 아르케 대 사르크스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음운론이나 의미론의 두 측면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서 알이 아르케와 대응한다면, 사르크스에 대응하는 우리말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아마도 그것은 '살'이 될 것이다. 이것은 '살'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접두사 'sarc-'의 존재를 참조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아르케에 [r]과 [k] 음운이 있듯이, 사르크스에도 [r]과 [k] 음운이 존재한다. 이 경우 알과 아르케, 살과 사르크스는 어원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알이 영혼, 살이 육체이듯이, 아르케는 영혼, 사르크스는 육체가 된다. 이 경우 우리말 '알기살기'는 임의로 만든 조어가 아니라, 알과 살의 대응을 전제로 한 파생어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것을 형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앍+이+삵+이 > 알기살기
여기서 '알기살기'는 온전한 알의 상태인 '알기'와 온전한 살의 상태인 '살기'가 서로 결합해서 나온 어휘가 된다. 그것은 곧 영혼과 육체가 서로 조화를 이룬 상태를 가리키는 부사가 된다. 그렇다면 '얼기설기'는 그 조화 상태가 일정 정도 손상당한 상태를 가리킨다. '얼기설기'가 조어라는 국립국어원의 설명을 수정할 수 있다면, 우리 문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 하나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 주장은 아직까지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이 가능성을 무조건 닫을 수만 없다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아리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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